[편집자가 독자에게]게시판 실명제와 권력관계

대자보 문화가 80년대 대학가에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에도 여러 가지 일들을 고발하고 세상을 규탄하는 익명의 글들이 거리에 조심스럽게 붙곤 했다. 나라로서는 골칫거리였을 것이다. 민심이 술렁여도 대자보의 범인을 도무지 잡을 수 없으니 말이다. 비록 정면 승부는 피해 익명 자보라는 방법으로 덤볐지만, 그 정도의 호응이라도 얻어낸다면 통쾌한 한판승을 거둔 셈이다.
얼마전 한 대학에서는 수업시간 교수들의 성폭력적인 언행을 모아 규탄한 익명의 자보가 붙었다. 오가며 대자보를 봤던 그간의 많은 피해자들-주로 여성들-은 그걸 보고 후련해하는 눈치였지만 아무도 대자보를 쓴 학생들이 누구인지 궁금해하진 않았다. 현실 속에서 학생과 교수의 권력관계가 얼마나 불평등한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교수가 학생들에게 ‘당당하게 실명을 밝히라’고 요구한다면 비겁한 건 학생이 아니라 교수다.
인터넷 게시판에서는 위의 상황이 역전되어 일어나기도 한다. 인터넷의 익명성을 이용해서 무분별한 테러를 일삼는 경우는 허다하다. 여성단체나 여자대학 홈페이지에 들어가 인신공격과 욕설을 일삼는 이들은 익명성의 방패 뒤에 숨어 남성과 여성의 권력관계를 가상 공간에 그대로 투영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몰지각한 사이버 테러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실명제로 전환한 게시판도 있다.
익명성은 그야말로 양날의 칼이 되고 있다.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그 칼 끝의 방향이 달라진다. ‘실명제 논쟁’은 기본적으로 익명성이 보장된 인터넷에서 자주 일어난다. 실명제에 찬성하는 네티즌은 인터넷 익명 사용이 무분별한 언어 폭력과 인신공격까지 불러일으킨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은 인터넷 상의 개인의 정보보호와 표현의 자유를 근거로 들고 있다.

이러한 실명제 논란에 정부가 나섰다. 며칠 전 정보통신부는 익명으로 글을 올릴 때 명예훼손 등의 문제가 빈번히 일어나고 있는 점을 보완하기 위해 인터넷 실명제를 도입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올 해 하반기부터 공공기관 홈페이지는 실명으로만 의견 개진을 할 수 있게끔하고 DAUM같은 민간 운영 게시판은 여론수렴과정을 거쳐 차차 해결책을 찾겠다는 입장이다.
인터넷 상에서의 익명 테러가 정부가 해결해야 할 정도로 심각해졌다는 사실은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정부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섣불리 나서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인터넷이라는 공간은 획일적인 잣대를 갖다 댈 수 있을 만큼 단순 명료한 공간이 아니다. 다양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무수히 많은 게시판들이 있고 나름의 기준으로 자치를 펼치고 있다. 또한 현실적인 권력자가 일방적으로 도입하는 실명제가 사회적 약자를 충분히‘무장해제’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도 우려되는 일이다. 실명제 도입 여부는 일단 권력을 덜 가진 쪽, 사회적 약자에게 자율적으로 주어져야 한다.
한 교사가 ‘검사와의 토론회’에서 대통령을 상대로 ‘청탁설’을 거론했던 검사에게 항의 메일을 보냈다가 컴퓨터를 압수당하고 검찰조사까지 받았다고 한다. 거대한 권력 앞에 점차 벌거벗겨지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요즘, 공공기관 게시판에 실명제 마저 도입된다면 ‘속 시원한 소리’는 어느 산골짜기 깊숙한 곳에서나 할 수 있을 것 같다.
Posted by smokyface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