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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7.28 [잡글] 신체와 폭력에 대한 시론의 시론 2

친하진 않았으나 내가 좋아했던 어떤 선배가 학부시절 했던 말이 있다.

"다른 어떤 것에도 견딜 수 있어도, 폭력 앞에서 만은 무릎을 꿇는다."

.......

초등학교 시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본 독립기념관에서 숱한 걸 봤지만 지금까지 기억나는 것이라곤
일본순사가 독립투사를 고문하는 장면을 재현해 놓은 모형들이었다. 고문의 재현은
그저 독립운동의 상징이라고는 칭하기 무색할 정도로 세밀했고, 자세했다. 그리고 수집된 모든 종류의
고문법들이 재현되어 있는 듯했다. 어린 시절의 나는 그 고통의 현장 속에서 한 동안 빠져나오지 못했고,
나는 스스로를 일본순사가 아닌 독립투사의 자리에 집어넣고 있었다. 독립기념관장의 취향이 새디스트적이었던
것일까? 차라리 고문 기술 박물관이라 불러도 무색한 곳으로 각인되어 있는 악몽같은 곳.

이근안의 구속이 화제가 될 무렵 나는 어느새 독립투사에서 민주화투사가 되어 잠시나마 상상고문의 잔혹함에
시달려봤다. 아, 박종철 열사는 어떻게 아무말도 않고 버텨냈을까? 김근태씨는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나는 참으로 평범한 사람이고, 그저 길거리에 넘쳐나는 아무개에 불과한데 그들처럼 할 수 있을까?
육체에 가해지는 고통에 대한 강인함이 자뭇 숭고하게 여겨질 때, 어느 술자리에서
그 선배가 웃으며 말했다.
"다른 어떤 것에도 견딜 수 있어도, 폭력 앞에서 만은 무릎을 꿇는다."
약간 취기가 오른 탓이었는지 몰라도 그 말은 복음과도 같이 머리속에서 끊임없이 공명했다.
나만의 고통이 아니라 인류 보편의 고통임을 당당히 고백하는 말과 같았고, 그 속에서 난 면죄부를 얻은 듯했다.
"맞으면 아프다"는 말과 사실 동일한 저 말이 왜 그리 입밖에 꺼내기 어려웠을까.
사람들은 모두 육체의 고통에 반응하고 민감하다는 그 사실이 왜 그렇게 이해하고 납득하기 어려웠는지.

그 이후 "육체"와 "고통"의 문제는 아주 가끔씩일지라도 좋은 화두가 되어주었다.
이는 인류의 가장 중요하고도 보편적인 문제인 "배고픔"과도 직결되는 것이고,
사실 사람이란 "육체"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는 존재론과도 닿아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인터넷으로 수백만이 서명하는 것과 길거리에 그 수백만이 서 있는 것이 왜 다른 차원의 것인지를
설명해줄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덕분에 지금은 "폭력"이 갖는,
구체적으로는 "신체에 가해지는 폭력"이 갖는 힘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고 있다.
촛불시위에 "비폭력"이라는 리본을 달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아니면 현명한 것인지
고민중이다. 쉽게 정리는 안될테지만, 그렇다.

Posted by smokyf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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