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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6.25 교양학부 졸업생과 국문과 졸업생 8

내가 국문과를 졸업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면 자연스레 몇 가지 선입견을 갖게된다.
1. 글을 잘 쓸 것이다.
2. 맞춤법에 정통할 것이다.
문제는 우리과에서 아무리 공부를 잘 하는-학점을 잘 받는- 학생이었다 하더라도 위 두가지와는
별개로 생각해야 한다는 점이다. 수업시간에 가르쳐 주지 않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1과 2는 기본적으로 어느정도는 해줘야 한다.
그게 우리과를 졸업했다는 것을 몸으로 증명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안타깝게도 난 공부를 열심히 한 학생도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위의 두 가지를 따로 연습하고
공부해본 적이 없다.
학교에 줄 곧 있을 때엔 크게 느끼지 못했는데 군대에선 전공 때문에 1, 2의 항목을 요구받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특히 갑자기 맞춤법을 물어보면 이상하게 헷갈리는 경우가 생기곤 했다.
"'게시판'이 맞나요? 아니면 '계시판'이 맞나요?"와 같은 틀릴 것 같지 않은 맞춤법을 두고서도
한동안 곰곰히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학부 1학년 시절엔 학과에서 국어와 관련한 쓸데없는 토론이 일어나기도 했었다.
지금 생각나는 것중에 첫 번째는 '된장찌게'와 '된장찌개'의 맞춤법 논란이었다.
사전을 찾으면 금방 해결될 문제였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이 논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던 것 같다.
두 번째는 학과 대동제 모토로 "모든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를 쓸 것인지 아니면
"금지하는 모든 것을 금지한다"를 쓸 것인지 하는 논쟁이었다.
'모든'의 위치에 따라 피수식어가 달라져 의미가 약간 변한다는 이야기였다.
프랑스 68혁명때 쓰였던 슬로건인 저 말을 어떻게 쓰고는 싶었지만
묘한 뉘앙스의 차이 때문에 오랜 시간 동안 토론을 했던 것 같다.
결론은 뜻의 엄밀함을 떠나 그냥 어감이나 리듬감이 좋은 후자로 가자는 것으로 결정됐다.
(그냥 원슬로건처럼 단순하게 '금지를 금지한다' 정도로 갔으면하는 후회가...)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덕분에 숟가락, 젓가락의 'ㄷ', 'ㅅ'받침에 대해 공부하게 된 적도 있었다.
영화에선 해답을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에 직접 알아봐야했다.
실제 그 영화가 상영되고 나서 과외 학생도 물어봤고,
내가 국문과생이란 걸 아는 주변에서 질문을 꽤 던졌었다.

이런 스트레스가 쌓이다보니 그냥 요즘엔 '교양학부'출신이라 둘러댄다.
학부 전공에 대해 제대로 공부해 본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반면에 흥미를 좇아
타 대학 전공을 얼마나 따라다녔던지. 그냥 학부과정에선 전공도 버리고, 학점도 버리고, 공부도 버리고
오로지 교양만 쌓은 셈치고 교양학부 졸업생이라고 해버린다. 물론 그런 학부는 없다.

얼마전 '고전문학 석사과정 수료생'인 룸메이트 김군과 함께 식당에서 밥을 먹다 "골든벨"을 보게 됐다.
하필 후반부에 나온 어려운 문제중 하나가 고전문학과 관련있는 문제였다.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가집으로 고려 - 조선의 많은 작품들과 처용가, 한림별곡, 서경별곡 등이 실린 책은?"

김군은 문제를 듣자마자 미소를 머금고 답을 던졌다.
"악학궤범이네. 아니면 학위 반납할게."
교양학부 출신인 나는 확인할 도리가 없어 멈칫 했지만 -_-;; ㅋ 고전문학 석사과정 수료생이 저렇게
자신있게 나오는데 틀릴까 싶었다.
그러나 정답은 악장가사.
나도 같은 국문과 출신임에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크게 비웃어줬다.

곧이어 골든벨 직전 49번 문제가 출제됐다.
"얼마전 미 발표시 50여편이 수록된 이 사람의 육필 원고가 발견되었는데
역사와 생명을 주체로 민중을 강조한 씨알 사상을 주장한 이 사람은?"
정답은 함석헌 선생님. 생각보다 문제가 쉬웠다.
내가 그 분의 책인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읽지는 못했고) 산 적이 있기 때문이다. -_-;;
의외로 김군은 정답을 알지 못했다.
나의 자신있는 대답에 '당해봐라'는 표정으로 비웃으며 학위 반납을 종용했다.
어쨌거나 정답은 발표됐고 나의 교양학부 졸업은 인정을 받게 됐다.
만약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분이 이 문제를 맞추고 골든벨 문제에 도전했더라면
우리는 최후의 승부를 벌였을 것이다.

여튼 긴 잡담의 끝은
"어디가서 쓸데없이 교양학부 졸업했다고 뻥치지 말고 작문과 맞춤법을 공부해서 당당히
국문과 졸업했다 말하자"는 교훈으로 마무리.

이렇게 긴 뻘 글이라니. 원래 뭘 쓰려고 했는지 생각도 안난다. -_-a

Posted by smokyf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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