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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물단지

일상/수다 2008. 9. 10.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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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얀 아크릴판에 놓인 이 책의 무게가 천근만근 납덩이 같다. 규장각 사서분께 이 책을 조심스럽게 받아 사무실로 가는 내내 한숨만 푹푹. 이 놈의 애물단지. "경상남북도각군보고"라는 이 책은 1900년대 초반, 구한말 세금이나 기업 등 각종 지역 경제활동과 관련된 공문서를 모아둔 책이다. 사진 속의 책은 방대한 분량 중 내가 맡은 한 권일 뿐이고.
  최근에 시작하게 된 규장각 알바?(정식으론 프로젝트 보조연구원)는 이 공문서를 읽고 수발신자, 수발신일, 도장, 판심, 주제어 등을 정리하는 일이다. 문제는 부족한 실력 탓에 할당량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인쇄된 한문도 겨우겨우 읽어가는 능력인데, 약자를 섞어가며 휘갈긴 공문서를 쓱 읽기란 내 한계를 시험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일주일에 80건의 공문서를 정리하면 되나, 어제 종일 자리에서 읽은 건 겨우 8건. 내 일주일은 7일이 아니라 15일쯤 되나하면 그것도 아니고. 연구원 선생님들이 한 두 달은 고생 실컷해야 한다고 일러주시긴 하시지만 한 두달 후에도 가능할지 의문이다. 남들은 대략 이틀정도면 다 해낸다고 하는데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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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이지 하나를 넘길 때마다 대략 정신이 멍해지는 경험, 요즘 매일한다. 평소에 공부 좀 해둘 걸 늘 후회한다.
  뒤늦게 세종대왕님께 감사드리게 된다.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구한말 관리 같으니....)

  불과 100여년 전 문서일 뿐인데 이렇게 읽기가 힘드니. 역사의 단절은 어찌보면 문자의 단절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르겠다. 훈련된 역사학자의 손을 빌리지 않고서는 과거사에 접근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워보인다.

  ps. 오래된 책이나 문서를 다루는 사람들은 피부와 기관지가 안좋아진다고 한다. 종이에서 이상한 독성이 나와 그렇다고 했는데, 나는 불과 한 권이지만 책을 앞에 펴두면 저녁 무렵엔 목이 따끔거린다. 책장을 넘긴 손도 그렇고 그 손으로 얼굴이라도 만지면 얼굴도 따갑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 몇 분은 마스크를 쓰시고 계시던데 나도 하나 구해볼까 생각중이다. 정말 애물단지.

Posted by smokyf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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