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메일을 정리하다 발견했다.
2003년 봄 그녀에게서 받은 편지엔 달랑 시 하나가 담겨있었다.
우리, 스물 다섯이란 나이조차 버거웠던 그 무렵이었다.
아마도 스물 넷부터 설레는 맘으로 품고 있었을 이 시가
그저 희망이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지금 다시 꺼내보니
차마 말하지 못했을 너의 고독과 슬픔이 담겨 있었다.
나는 이 시를 읽는데 완전히 실패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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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미, 비망록
햇빛에 지친 해바라기가 가는 목을 담장에 기대고 잠시 쉴 즈음, 깨어 보니 스물 네 살이었다. 신은, 꼭 머리카락까지 조리며 숨어 있어도 끝내 찾아주려 노력하지 않는 거만한 술래여서 늘 재미가 덜 했고 타인은 고스란히 이유없는 눈물 같은 것이었으므로.
스물 네 해째 가을은 더듬거리는 말소리로 찾아왔다. 꿈 밖에서는 날마다 누군가 서성이는 것 같아 달려나가 문 열어보면 아무 일 아닌 듯 코스모스가 어깨에 묻은 이슬발을 툭툭 털어내며 인사했다. 코스모스가 그 가는 허리를 안고 들어와 아이를 낳고 싶었다. 석류속처럼 붉은 잇속을 가진 아이.
끝내 아무 일도 없었던 스물 네 살엔 좀더 행복해져도 괜찮았으련만. 굵은 입술을 가진 산두목 같은 사내와 좀더 오래 거짓을 겨루었어도 즐거웠으련만. 이리 많이 남은 행복과 거짓에 이젠 눈발 같은 이를 가진 아이나 웃어줄는지. 아무 일 아닌 듯. 해도,
절벽엔들 꽃을 못 피우랴. 강물 위인들 걷지 못하랴. 문득 깨어나 스물 다섯이면 쓰다 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 오래 소식 전하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실낱처럼 가볍게 살고 싶어서였습니다. 아무것에도 무게 지우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