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수다'에 해당되는 글 76건

  1. 2007.08.27 충무로

충무로

일상/수다 2007. 8. 27. 21:09

내가 좋아하는 곳 충무로.

충무로와 첫 인연을 맺은 건 아마 인문대 선거 때 였던 것 같다.

다음날 배포해야할 선본신문을 편집하고나니 이미 저녁 늦은시간이었고, 친구와 난

조악하고 몇 부 되지도 않는신문을 찍어줄 인쇄소를 찾아야 했다.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통째로 떼어내서 필름 출력까진 금방 마쳤지만

종이파는 곳도 모두 영업을 마쳤고, 인쇄소는 더더욱 보이질 않았다. 더구나 수 백부의 소량을

당장 찍어줄 인쇄소는 말이다.

충무로 구석구석을 누비며 영세한 인쇄소들을 찾아다녔고- 다시 찾아가라고 해도 찾기 힘든..-

컴컴한 골목을 다니는 우리를 누군가가 불러 세웠다.

퇴근을 준비하던 아저씨는 술값이나 벌어보자며 인쇄해줄 수 있다고 했다.

교회 주보 같은 용지에 찍어낸 신문은 볼품없었지만 시간을 맞출 수 있는 것만으로도 큰 행운이었다.

아저씨는 우리에게서 얼마 되지도 않는 돈을 받고선 헤헤 웃으시며 술친구들을 규합했다.

우리 때문에 잠시 올렸던 셔터를 내리며 앞으로는 일찍일찍하라는 충고를 해주셨지만,

충무로는 그 아저씨 한 분 만으로도 정감있는 곳이 되어버렸다.

매년 학생회 선거를 할 때면 난 충무로를 들락거려야 했고, 며칠간 힘들게 작업한컴퓨터 파일을

출력소에 맡겨놓을 때면온 몸의 긴장이 풀리는 경험을 수도 없이 했다. 단골 출력소의 일이 많아 필름

작업이 늦어지면 만화방이나 근처 영화관으로 갔고, 금방 끝나는 일이면 밀렸던 식사를 해결했다.

밤을 새우고 정신도 못차린 나에겐 싸고 맛있는 우렁된장이나 순대국 같은 것이 언제나 최고였다.

내가 들고 간 것은 언제나 소량이었고, 아마추어의 작업물이라인쇄하기에 부족한 것도 많았지만

인쇄소 아저씨들은 옆집 아저씨들같이 잘 대해주었다. 남는 시간 충무로의 뒷골목을 돌아다니면

잉크냄새, 종이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새 책에서 나는 냄새마냥 좋기만 했다. 인쇄기 돌아가는 소리도

박자에 딱딱 맞아들어 갔고, 한 쪽편의 흰 종이들이 다른 쪽으로 넘어가기만 하면 멋있는 브로셔로,

아기자기한 신문으로 바뀌는 것도 좋았다..

이 후에도 대학생신문을 인쇄하면서 충무로는 정겨운 곳이 되고 말았다. 왜 그저 그 냄새가 좋았고 그 사람

들이 좋기만 했는지는아직도 모르겠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두 가지가 더있다. 냉면과 대한극장

처음으로 정통평양 냉면을 맛본 곳이 동국대 후문에 있는 필동면옥이었다.

원체 냉면을 좋아하다보니 대충 주위를 둘러보다 찾아들어간 곳이었다. 가격이 일반냉면의 두 배는

되는 곳이었기에 한 번 깜짝 놀랐고, 그 밍밍한 맛에 두 번 놀랐다.

"이렇게 맛대가리 없는게 왜이리비싸..."

다음번에도 냉면을 먹으러 주위를 돌아다녔지만 그 곳 말고는 보이질 않아서 다시 들어가게됐다, 각오하고.

역시....

"이렇게 맛대가리 없는게 왜이리비싸..."

세번째 찾아가고 나서야 그 오묘하고 깊은 맛을 알게 됐다.

충무로에 있는 또 다른 을지면옥과 함께 충무로에 갈 때면 들르는 곳.

충무로의 필동면옥, 을지면옥은 마포의 을밀대와 함께내가 가장 좋아하는 냉면집이 됐다.

대한극장은, 그냥 다 좋다. 극장이 좋은 곳이다.

대학교 2학년때였나? 우리나라 최대 스크린인 대한극장이 멀티플렉스로 바뀐다고 해서 마지막

상영작인 아라비아의로렌스를 보러갔었다. 무지막지한 영화길이로 인해 중간에 쉬는 시간이

있는 것도 어이없었지만 영화의 웅장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영화를 마지막으로 대한극장도 시대의 조류를 타고 멀티플렉스로 바뀌었고...

우연찮은 기회에 가본 극장이었는데... 그냥 군살 없이 기본기에 충실한 극장이었다.

영화를 사랑하는 극장이었다.

멀티플렉스지만 모두 균등하게 화면은 컸고, 사운드에도 엄청난 신경을 쓴 티가 났으며

약간 젖혀지는 의자도 편했다. 높이도 높아서 앞사람에게 가릴 일도 없었으며 간격도 충분해

무릎이 쉽게 닿지도 않았다. 특히 맘에 든 것은 서울 시내와 남산이 꽤 근사하게 보이는

옥상정원이 있다는 것. 영화를 기다리며 담배를 피거나 커피 한 잔하고 친구와 놀기에

딱 좋은 곳이 있었다. 뭐 올라가기 귀찮으면 베란다도 나쁘지 않다. 심지어 계단 통유리로 보이는

야간의 도로 풍경도 멋지다. 복작거리는 시내 여느 멀티플렉스들에 비하면 영화를 즐기기엔

최적의 공간이 대한극장이었다. 지하철과 바로 연결되는 것도 괜찮고.....

다만 주차장이 떨어져 있어서 차있는 사람은 불편할 것 같고, 주변이 바로 번화가가 아니어서

영화관람과 데이트를 묶어서 즐기는 사람들은 피할 것도 같다. 하지만 덕분에... 주말에도

상대적으로 한적하고 쾌적하게 영화를 즐길 수 있다는 것이 고마울 따름이다.

대한극장과 필동면옥을 묶으면 내가 좋아하는 한 세트가 나온다. 예술영화를 주로 보여주는 명보극장은

을지면옥과 묶으면 된다. 그 사이 길에서 강아지도 구경하고, 오토바이도 구경하고, 카메라나 매킨토시 컴퓨터같은 것들도 만지작 거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영화가 끝나고 걸어서 명동까지 가보는 것도 좋지만,

극장앞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남산에 오르는 것도 더 좋다.

그래서 충무로가 좋다.

Posted by smokyface
,